만주벌 봉오동 승리 뒤에는 최운산이 있었다 신문에서 퍼온 歷史

중국 지린성 투먼시 봉오동에는 저수지가 있다. 봉오수고(鳳梧水庫)라고 한다. 육중한 철문을 넘어가면 왼쪽 언덕 아래에 탑이 하나 보인다. 이렇게 적혀 있다. '봉오골 반일 전적지(鳳梧溝反日戰迹地)'. 봉오동 전투. 만주벌판 무장독립투쟁사에 빛나는 봉오동대첩 기념탑이다. 1975년에 건설된 봉오저수지 너머 산중에 그 전투 현장이 숨어 있다. 그 뒤로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어른 키 높이에서 소나무는 두 갈래로 갈라져 하늘로 뻗어 있다. 봉오동 아래 조선인 마을 수남촌(水南村) 촌장 라철용(52)이 말했다. "이 소나무, 백살은 넘었다. 한 갈래는 홍범도 장군이요 한 갈래는 최진동 부장이다." 홍범도는 알겠다. 명포수에 지략을 겸비한 봉오동 전투 지휘자. 그런데 최진동은 누구인가. 게다가 '부장'이라니.

라철용은 아주 오래 수남촌에 살았다. 188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가가 두만강을 넘은 이래 집안이 이곳 봉오동에 산 지 131년째다. 수남촌은 조선족 마을이다. 주민 1200명 가운데 260명이 한국을 비롯해 외지에 나가 돈을 번다. 라철용도 그랬다. 20대부터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했다. 큰돈을 만졌다. 마음 한구석은 늘 봉오동에 있었다.

라철용은 친구들과 함께 봉오동 차오마오딩쯔산(草帽頂子山)까지 소풍 가듯 오르내렸다. 일본군 녹슨 철모를 주우면 거기에 한가득 탄피를 채워 내려오곤 했다. 그게 뭔지 몰랐는데, 알고 봤더니 봉오동전투 때 일본군이 버리고 간 흔적들이었다. "동네 노인들 만나면 무조건 봉오동 이야기를 묻고 다녔다. 카자흐스탄에 가서는 홍범도 장군 무덤도 참배했고, 고려인 할머니들 만나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재일교포 레슬러 역도산 전기를 보여주는, 분단이 된 줄도 모르고 살고 있던 카자스흐탄 고려인 할머니 손을 쥐고서, 한참 망설이다가, 무역을 때려치우고 귀향했다.

그가 말했다. "그 당시 피를 흘리고 아까운 청춘이 다친 거 헛되이 하지 않게 후대에게 전해줘야 하는, 그런 사명감?" 그래서 힘쓸 수 있는 공산당원이 되었고 촌장이 되었고 20136월 봉오동 저수지 초입에 커다란 전적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마을회관에는 한국 관광객을 위한 전시관도 만들어놓았다. 그 젊은 촌장 입에서 '최진동 부장'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온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진동-운산 형제'.

봉오동과 청산리전투

192064일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있는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했다. 일본군 1개 소대가 이들을 추격하자 독립군은 즉각 퇴각했다. 두만강을 넘어 추적해오는 일본군에게 또 다른 독립군 부대가 일격을 가하고 즉각 퇴각했다. 함북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19사단이 1개 대대를 보내 독립군 사령부가 있는 봉오동까지 진격했다.

3면이 산으로 싸인 고산 분지 봉오동에서 일본군은 매복해 있던 독립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교전 결과는 공식 기록상 아군 전사자 3, 일본군 전사자는 157, 부상 10명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맞붙은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리'였다. 4개월 뒤 연합 세력이 주 활동지로 복귀하면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붙은 전투가 청산리전투였다. 이 또한 만주 무장투쟁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로 기록된다.

봉오동을 본영으로 하는 독립군 이름은 북로독군부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간도국민회군과 최진동-최운산의 군무도독부군이 연합한 부대였다. 1군사령관은 홍범도, 독군부 부장 즉 연합사령관은 최진동이었다.

수남촌 촌장 라철용에 따르면, 봉오동은 "삿갓처럼 쑥 들어가서 외부에 노출이 불가능한 요새(要塞) 지형"이다. 그 요새 지대에 19153000평이 넘는 거대한 군시설이 들어섰다. 연병장은 물론 대형 막사 3개동, 이 시설들을 에워싼 두께 1m짜리 토성(土城)도 있었다. 일본군은 '비적 잔당' 뒤를 쫓아 두만강을 넘고 능선을 타고 봉오동으로 들어와 덫에 걸려 자멸한 것이다. 그 사령부를 건설한 사람이 바로 최씨 형제였다. 그중에서도 동생 최운산이었다. 우리는 최운산을 알고 있는가.

봉오동의 영웅 최운산(1885~1945)

최운산은 1885117일 옌지(延吉)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이다. 최운산은 중국어에 능통했고 고위 관료 친구도 많았다.

중국이 토지 정리를 할 무렵 최운산은 몇 개 군()에 이르는 벌판을 헐값에 불하받았다. 개간 작업을 거친 황무지는 값이 폭등했고 최운산은 갑부 지주가 되었다. 축산, 미곡, 무역에 주류, 제면, 성냥, 비누 공장까지 운영하는 간도 제1의 거부가 되었다. 최운산의 손녀 최성주(60)"함께 투쟁했던 어르신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 땅이 부산 면적의 여섯 배였다"고 했다.

무술과 총술에 능한 최운산은 간도 지역 중국 군관으로 근무했다. 형 최진동, 동생 명순도 함께 일했다. 마적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군사학교를 열고 사병(私兵)도 조직했다. 1915년에 그 사병 숫자가 500명에 달했다. 자위부대 이름은 도독부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발효되고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무대를 만주로 옮겼다. 1910년 최씨 형제는 봉오동으로 이주했다. 봉오동을 이 운동가들의 기지로 택한 것이다. 옌볜대 민족력사연구소 교수 김춘선에 따르면 "(최씨 형제는) 만주를 경유하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환대하고 지원했다."

봉오동에 독립군 기지가 완성된 해가 1915년이다. 3·1운동이 터지고 도독부는 군무도독부로 확대됐다. 최운산은 형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는 이렇게 기록했다. "한 푼의 찬조금 없이 최운산의 사재로 장비, 피복, 식량을 조달했다. 대포 6, 장총 500, 권총 수십 정, 실탄 수만 발, 수류탄 수백 개." 무기는 중국-러시아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서 구입했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독립군, 그러니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최씨 형제의 군무도독부를 통합한 조직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였다. 형제 가운데 형 최진동이 그 총사령관 격인 '부장(府長)'이었고(그런데 봉오동에 있는 기념탑에는 홍범도가 사령으로, 최진동이 부사령으로 기록돼 있다. 이유가 있다).

군수물자 구입과 기지 건설, 식량 구입 비용은 모두 최운산이 댔다. '부산 여섯 배에 달하는' 토지를 팔았고 공장을 매각했다.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반병률이 말했다. "갑자기 봉오동에 연합사령부가 생긴 게 아니다. 최진동, 최운산 같은 물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몇 년 동안 공을 들인 군사기지였다. 만주 내 무장세력 통합에 성공한 최운산은 국내 진공 작전을 간헐적으로 벌이며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봉오동 지리는 누구보다 익숙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최초로 맞붙은 한일 정규군 전투는 북로독군부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런데 우리는 최진동을 모르고 최운산을 모른다. 심지어 봉오동 현지 기념비에도 홍범도 휘하에 최진동이 활동했다고 새겨져 있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은 간도 지역 독립군 박멸 작전에 돌입했다. 이른바 간도참변이다.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따르면 3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끔찍한 방식으로 학살됐다. 이후 간도 무장 세력은 러시아로 대거 옮겨갔고 사회주의혁명군에 동참해 투쟁을 이어갔다. 홍범도도 그랬고 최진동도 최운산도 그랬다. 홍범도는 훗날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돼 크질오르다시 정미소에서 일하다가 극장 수위로 생을 마쳤다. 최운산은 여러 차례 투옥과 고문을 겪었다. 가산은 탕진했다. 194575일 광복 40일 전, 최운산은 평양에 피신해 있던 아들 봉우의 집에서 죽었다.

1945년 일본이 패주했다.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문화혁명기, 이미 죽은 최진동에게 친일파 낙인이 찍혔다. 지주라는 출신 성분이 문제였다. 일본에 당시 돈 100원이 안 되는 헌금을 한 사실도 드러났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윤경로는 "그가 한 행적에 비하면 흠결 사유가 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가족들은 생존을 위해 최진동의 묘를 파묘하고 유골을 개울가에 파묻었다. 소련 빨치산부대에서 활동했던 홍범도가 현지에서 총사령관으로 기록된 이유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1980년대 초에야 무덤은 복구됐다.

분단 후 평양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던 4남 최봉우는 1·4후퇴 때 걸어서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와 함께 부산까지 피난했다. 김성녀는 이후 총무처에 남편의 공적을 인정받으려 노력을 했다. 19611월 건국훈장을 준다는 연락을 받고 아들과 함께 상경했다. 뒷돈을 요구하는 담당 직원에게 아들 봉우가 주먹을 날렸다. 서훈이 취소됐다.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건국훈장을 받던 1963년 형 최진동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동생 최운산이 다시 서훈된 것은 1977년이다. 1983KBS 이산가족찾기 운동에서 옌볜에 살고 있던 최운산의 후손들과 한국에 와 있던 최봉우가 극적으로 만났다. 최봉우의 딸 최성주가 말했다. "사가(史家)들이 사실을 바로잡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봉오동을 답사하고 옛 사람들, 옌볜 학자들을 만나 우리가 우리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2005년 최진동의 유해가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봉환됐다. 한국외대 교수 반병률이 말했다. "역사는 영웅 한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다. 모두가 함께 만드는 게 역사다." 봉오동 전투도 마찬가지 아닌가.

-조선일보, 2017.3.8.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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