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역사탐방-개화의 섬 강화도


역사 없는 땅이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강화도는 좀 유별나다.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흔적이 섬 안에 가득하다. 신록 고운 길 따라 걸으면 그게 그대로 또 하나의 역사가 되는 섬, 강화도. 오늘은 근대의 물결을 따라가 본다. 강화도의 상징 같은 사찰, 전등사에서 첫걸음을 내디디면서.

전등사 대웅보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추녀 밑 나녀상들은 언제 보아도 인상적이다. 도편수를 배신한 여인의 형상이라는 전설은 사실 여부를 떠나 흥미롭다. 이 절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81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천년 고찰도 대단한데 여기는 천 년에 육백 년을 더해야 한다. 절 마당 나무 그늘에 앉아 대웅전을 올려다보니 고풍스러운 기운이 전해져 온다.

부처님 오신 때라 더욱 활기가 넘친다. 대조루, 약사전, 명부전을 거쳐 조선왕조실록을 모셨던 정족산사고까지 가보고 돌아선다. 잘 가라는 새소리를 뒤로하며 잠시 걸으면 동문. 전등사의 출입문처럼 쓰이다 보니 답사객들이 무심히 지나친다. 전등사를 품고 있는 산이 정족산이다. 이 산에는 빙 둘러 산성이 있다. 이름은 정족산성.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있는데 동문과 남문을 통해 전등사에 드나든다.

정족산성은 삼랑성이라고도 부른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사등에 실려 있을 만큼 유래 깊은 이야기이다. 삼랑성 동문 바로 안쪽에 있는 작은 비각 하나. 어느 스님의 행적을 기리는 비겠거니 여기기 쉬운데 사실은 양헌수 장군 승전비이다. 양헌수 장군은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을 격파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승전비가 왜 여기에? 바로 이 자리가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무찌른 자리라서 그렇다.

150년 전. 산성에 몸 숨기고 적을 기다리는 조선군. 숨 막히는 침묵, 그리고 사격 개시. 쌍방 간 치열한 총격전. 고함, 비명, 뿌연 화약 연기. 거듭 쓰러지는 프랑스군. 결국은 퇴각. 프랑스군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열악한 무기로 싸워 적을 무너트린 조선군의 기개, 그리고 함성, 뜨거운 눈물.

강화도 갑곶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이내 강화부를 점령한다. 프랑스군은 선교사 학살에 대한 관련자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결정한 것은 무력 대응. 대원군은 프랑스군을 치기 위해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등을 강화도로 보냈다. 양헌수는 포수군 중심의 500여 병력을 이끌고 정족산성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병사들을 수습한 후 강화읍내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먼저 읍내에서 정족산성까지 와서 양헌수 부대를 공격했던 것이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황급하게 강화도에서 철수한다. 곱게 갔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았다. 읍내에 불을 질러 다 태우고 외규장각도 태웠다. 수천 권의 귀한 책들이 재가 되었다. 그들이 탈취해갔던 수백 권의 어람용 의궤는 우여곡절 끝에 국내로 돌아왔다. 지금 고려궁지 안에 외규장각 건물이 복원돼 있다.

대략 한 달 동안 프랑스군에게 읍내가 짓밟혔지만,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에 큰일이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의 지도층으로서 주민들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 인물이 있었다. 이시원이다.

그는 죽어서 사나운 귀신이 되어 이 밝고 밝은 세상에서 저 추악한 무리(프랑스군)로 하여금 스스로 섬멸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이시원의 손자가 조선 양명학(강화학파)의 큰 별인 이건창이다.

너무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푸근한 전등사 품에서 벗어나 광성보로 향한다. 병인양요 겪고 불과 5년 만에 조선은 미국의 침략을 받게 된다. 이번엔 신미양요(1871)이다. 프랑스도 미국도 왜 하필 강화도만 공격하는가. 강화도가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강화도를 장악해야 서울의 숨을 조일 수 있다. 광성보는 조선군이 미군과 최후의 격전을 치른 곳이다.

문루 지나 오른쪽 숲길로 들어서면 머지않아 쌍충비각. 전투를 지휘했던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순절을 기리는 비가 그 안에 있다. 전투 얼마 전 어재순이 형을 찾아 광성보에 왔다. 어재연은 동생을 돌려보내려 했다. 아마도 너는 살아서 집안을 이끌어라.”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동생도 형의 속마음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았다. 공부밖에 몰랐던 선비 어재순은 마치 빼어난 병사처럼 싸우다 형과 함께 전사했다. 어재연 형제의 순절비에 이렇게 쓰여 있다. “형은 나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쌍충비각 바로 아래는 신미순의총이다. 미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시신을 함께 모신 묘소다. 미군의 거친 포격에 광성보 어재연 부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몸이 새카맣게 타버렸거나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동료의 시신을 보면서도 조선군은 도망가지 않고 버텼다. 포격이 끝나자 미군이 공격해왔다.

조선군은 맹렬하게 싸웠다. 살벌한 백병전, 싸우다 쓰러져도 포기하지 않았다. 흙을 집어 미군의 얼굴에 뿌리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고 또 싸웠다. 많은 전투를 치러 온 미군이지만, 이렇게까지 나라를 위해 온몸으로 맞서는 병사들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아무튼, 남북전쟁 등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은, 절대적으로 우세한 무기를 갖춘 미군을, 조선군은 이겨낼 수 없었다. 목면으로 두툼하게 만든 방탄조끼도 소용없었다.

어재연 형제를 비롯해 수백 명의 조선 수비군이 전사했다. 수습된 병사들의 시신을 모신 곳, 신미순의총이다. 이윽고 손돌목돈대. 격전의 현장이 바로 여기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바닷가로 내려가면 용두돈대가 있다. 손돌목의 거친 물소리가 마치 우리 병사들의 절규 같기도 하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갑곶에 상륙해 지금의 읍내를 점령한 데 비해 신미양요 때의 미군은 강화도 동남쪽 해안가에 집중했다. 그들은 초지진에 상륙해 덕진진을 점령하고 이내 광성보로 쳐들어 왔었다. 미군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미군의 개항 요구를 거부했다. 오래 머물 형편이 못된 미군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한다.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 허망한 귀환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 조정은 프랑스군과 미군을 격퇴한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비판하기도 한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고집해서 쓸 데 없는 전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때 개항해서 근대화를 추진했다면, 성공했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결론 내리기에는 당시 국내외 상황이 너무도 복잡했다.

쇄국이 무조건 잘못됐다는 주장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견해를 갖던 그것은 개개인의 몫이다. 다만, 강대한 외적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맞섰던 선조들의 죽음의 가치만큼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 같다.

광성보에서 차로 잠깐이면 초지진을 만난다. 초지진이라는 부대 이름이 무색하게 아무 건물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소나무 벗 삼아 우뚝 선 초지돈대가 있을 뿐이다. 미군이 상륙할 당시 초지진의 조선 수비군은 제대로 방어전을 펼칠 수 없었다. 미군의 함포 포격에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운요호 사건(1875) 때는 달랐다. 초지진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끈질기게 싸웠고 드디어 격퇴했다. 운요호는 애초 상륙 의도가 전혀 없이 강화 수비군의 포격만 유발하고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꼬박 이틀 동안 초지진을 공격하며 상륙을 시도했지만 조선군의 반격을 뚫지 못하고 물러간 것이다. 초지진 벽 곳곳에 그리고 소나무에까지 포탄에 맞은 흔적이 있다. 신미양요 때 그런 것인지 운요호 사건 때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전투의 상흔 속에서 뜨거움을 본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1876)을 맺고 개항하게 된다. 조약 맺은 장소는 연무당. 지금 강화산성 서문 안 공터에 연무당 옛터라고 새긴 비가 서 있다.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지만, 불평등 조약이기도 하다. 치외법권을 비롯해 조선에 불리한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다보니 강화도 조약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도 말해진다.

일본이 개항하면서 미국과 맺은 조약도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개항 이후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조선이 망한 것은 강화도조약 때문이라기보다 개항 이후의 대처가 슬기롭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흔히 강화도조약을 평가할 때 굴욕적이다, 치욕적이다, 라고 한다. 일본을 그만큼 낮춰보고 내린 평가다. 하지만 냉정하게 볼 때 당시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근대적 체질을 갖췄다. 경제 수준도 우리보다 나았다. 특히나 서양식 무기를 구비하여 군사력까지 강화한 상태였다. 굴욕, 치욕을 말하기에 앞서 왜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지 냉정한 복기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바람이 분다. 늘어졌던 초지진 깃발들이 일제히 일어나 펄럭인다. 깃발은 펄럭여야 힘이 느껴진다. 개화와 근대화의 시발점 강화도 그리고 초지진. 여장에 기대 바다를 보며 생각한다. 영욕, 그래 영욕이다. 모든 걸 겪으며 지금에 이른 강화 땅에서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통일시대>>, 2017년 5월호,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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