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관 “日에 끌려온 지 400여년… 뿌리에 대한 긍정이 자부심 낳았다”

  

조선 도공심당길의 14대손, 심수관 인터뷰


한국도 가을이겠네요.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90세를 넘긴 14대 심수관(沈壽官) 옹은 기자가 찾아간 이틀 동안 10번도 넘게 한국의 가을 얘기를 꺼냈다. 그 맑고 청명하면서도 쓸쓸함이 느껴지는 가을 날씨가 그립다고,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데 잘될지 모르겠노라고.

지난달 30일 찾은 심수관 도요는 일본 서남단 규슈(九州)에서도 남서쪽 미야마(美山)에 자리하고 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전북 남원에서 끌려온 도공의 후예들이 400년 넘게 이곳에서 마을을 이뤄 살아왔다. 요즘도 가고시마(鹿兒島) 공항에서 두 시간마다 떠나는 버스를 타고 1시간 반, 거기서 다시 택시를 타야 도착하는 구석진 곳이다.

제가 이룬 모든 것은 아버지의 꿈

그는 400여 년 전 조선에서 끌려온 심당길의 14대손이다. 심수관가는 사쓰마(현 가고시마)번에 소속돼 사족(士族·사무라이) 대접을 받으며 대대손손 도자기를 빚어왔다. 지금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도자기 명가다. 메이지유신 시기 가업을 빛낸 12대 심수관의 업적을 기려 이후 자손들이 그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1926년생인 14대는 요즘도 거의 매일 도요를 찾는다. 1999년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뜬 뒤 도요에서 가까운 자택에서 애견 고타로와 함께 생활한다. 장녀 기요하라 마사코(淸原正子·61) 씨가 매일 들러 식사와 생활을 돕는다. 14대는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1969년 간행)의 주인공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이 평생 한 일이 실은 아버지 13대의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저 노보리가마(산비탈에 계단 모양으로 만든 도자기 굽는 가마), 수장고도, 공방도 모두 13대의 염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1964년 세상을 뜨기까지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돈만 있다면 이걸 할 텐데, 저걸 할 텐데. 그런 얘기를 곁에서 들으며 자랐습니다.”

당대 일본 최고의 지식인이자 작가인 시바 료타로의 호의와 조언은 심수관도요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작가는 그에게 보통 사람 한 달 월급 정도 되는 가격대의 작품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여유가 생긴 1970년 초 그는 맨 처음 일본식 다실(茶室)부터 지었다. 제대로 된 다실을 만들기 위해 다도의 종가 우라센케(裏千家)에 설계를 맡겼다. 시바가 이를 언론에 알린 뒤 일본 다도계에서 심수관 다실에서 차를 마시고 오지 않으면 다인이 아니다라는 얘기가 돌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그렇게들 오면(차를 마시러 오면) 그냥 가지 않습니다. 당시 제가 만든 다완(찻그릇) 가격이 3만 엔 선이었는데 너도나도 사려 하는 바람에 가격이 9만 엔까지 올라갔습니다.”

도자기도 브랜드 마케팅

일본 유수의 문화인들과의 교류를 늘려가면서 심수관 도자기의 가치는 갈수록 상승했다. 그렇게 해서 선대의 빚을 갚고, 가마를 늘려 짓고, 공방을 짓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작품들을 보존 전시하기 위한 수장고(收藏庫)까지 완성했다. 2층으로 된 수장고 건물은 막대한 돈을 들여 어떤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튼튼하게 지어졌다. 초대 심당길의 히바카리(火計·흙과 기술은 조선 것이고 오로지 불만 일본 것이라는 의미) 다완을 비롯해 조상들이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가 말해준 일화는 1980년에 완공된 수장고에 이 집안의 염원이 얼마나 담겨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공사가 80% 정도 진행됐는데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오늘내일하고 있었습니다. 의사 몰래 어머니를 제 차에 태워 모시고 와 공사 중인 건물에 업고 올라갔습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내려 달라고 하시더니 후들거리는 다리로 버티고 서서 만세를 세 번 외치셨습니다. 그러고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꿈도 아버지의 꿈과 같았거든요. 다시 병원으로 모셔 가는 차 안에서 우리 모자는 아무 말 없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나눴습니다.”

아버지 13대는 교토(京都)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도공의 삶을 이어갔다. 시대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다. 전쟁 말기 혈기왕성한 아들이 친구들처럼 사관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마당의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무들이 스스로 원해 여기 심겨 있는 건 아니다. 산과 들에서 자유롭게 자랐겠지. 하지만 지금은 심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목숨 다할 때까지 노력한다. 우리도 저 나무와 같다.” 이 일은 그가 도공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아들아, 1998년을 잘 부탁한다

아버지가 1964년 세상을 뜨며 남긴 유언은 “1998년이면 이곳에 온 지 400주년이다. 그때를 잘 부탁한다였다. 그는 그 뒤 30여 년간 사쓰마야키 전래 400년 기념제를 어떻게 성공시킬 것인가 궁리하고 준비하면서 보냈다.

첫 번째 꿈은 조선의 불씨를 미야마에 가져오는 것. 초창기 조상들이 조선의 흙과 기술로 일본의 불만 빌려 빚은 그릇을 히바카리라고 불렀지만 이번엔 고향의 불을 가져와 일본의 흙과 기술로 도기를 빚고 싶어서였다. 결국 1998년 남원에서 채취한 불씨를 미야마에 가져왔다. 불씨는 지금도 미야마도유칸(美山陶遊館)에서 불타고 있다.

또 하나가 귀향 전시회였다. 단 한 번도 가고시마를 벗어난 적이 없던 수장고의 도자기들도 고향이 그리울 거라 생각해 서울에서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이 꿈은 19987월부터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400년 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 도예전으로 결실을 맺었다. 5주간 5만여 명이 관람하는 성황을 이뤘다.

전시회는 사실 제게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행사 전에는 몇 달을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걱정이 많았습니다.”

한국 전시 계획이 알려지자 지역 언론들이 엄청나게 반대했다. 수장고의 140여 점은 사쓰마야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컬렉션인데 자칫 사고라도 나면 그것을 통째로 잃을 수 있다는 우려였다. 심수관가 선조들이 만든 도자기들이 통째로 미야마를 벗어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400년제를 성공적으로 끝낸 날 밤, 행사 전까지 끊었던 술을 마시며 옆에서 밥을 먹는 아들을 바라봤다. 당시 아들의 나이 39. 자신도 38세에 당주를 이어받았다. “내년 성인의 날 당주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나이 72세 때였다.

요즘 그는 “90을 넘긴 지금 평생의 숙제는 다 했다고 말한다. “손자인 16대까지 도요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지는 15대에게 맡길 뿐입니다.”

문화는 알아주는 이가 있어야 빛난다

한국 도자기가 일본에서 꽃핀 이유를 그에게 물으니 일본에 다도(茶道)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도 덕에 도예를 다이아몬드로 여기는 문화가 일본에 생겨났고 도예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차 문화는 중국에서 시작돼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일본은 이를 도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다도의 전성기이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다완은 성() 하나와 바꿀 정도의 가치를 가졌다. 임진왜란이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는 이유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조선 도공들의 작품이 서양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사쓰마야키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수출돼 나갔다.

조선이 천시했던 도공들을 일본은 사족으로 모시며 대접했고 그런 환경에서 기술을 갈고닦은 장인들은 서양사회에 자포니즘(1920세기 초 유럽에서 일본 미술과 문화를 즐기고 선호한 현상)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이뤄진 일본의 근대화와 부의 축적은 결국 제국주의로 이어지게 되니 아이러니한 순환이 아닐 수 없다.

사토의 휘호 묵이식지의미는?

14대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가문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임을 추정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9641972년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에게서다. 지금도 그의 거실에는 사토 전 총리가 써준 휘호가 걸려 있다. ‘묵이식지(默而識之)’라는 글씨 곁에 심수관 선생에게, 갑인년 봄 에이사쿠라는 서명이 적혀 있다. 갑인년은 1974년을 뜻한다.

14대는 사토 전 총리가 이 휘호를 써준 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사토 전 총리는 차를 대접받은 뒤 좋은 차였습니다고 인사하고는 수관 씨, 몇 대째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14대입니다라고 하니 저는 좀 더 짧을 겁니다. 당신네는 게이초(慶長·15961615) 때 왔는데 우리 선조는 그 뒤에 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붓과 벼루를 청해 글씨를 써줬다는 것이다. 묵이식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 통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14대는 그 말의 진위를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사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는 예로부터 조선반도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라 가능한 얘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아베 현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친동생이다. 1975년 세상을 떴다.

뿌리에 대한 긍정은 발전의 에너지 낳아

그는 첫 한국 방문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196511월경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 대구 대전 등에서 1박씩 하며 서울로 향했다. 가는 길에 허름한 대포집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그의 사연을 들으면 “400년 만에 돌아왔다니, 불쌍해서 어쩌나. 환영한다며 술잔을 권하곤 했다. 그리고 처음 본 한강.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한강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강이라고 들으며 자랐거든요. 선대로부터 고국에 대한 자부심과 집안에 대한 긍지를 물려받으며 자랐는데 자신의 뿌리에 대한 강한 긍정이 자부심을 낳는 것 같습니다.”

당시 서울대에서 강연도 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로 대학가가 시끄럽던 때였다. 14대는 계란을 맞을 각오를 하고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강연장이 일순 고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누군가가 일어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르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더니 모두가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저를 초청한 교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와 껴안아 주더군요. 학생들도 그 위에 포개어 껴안았습니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20132월 마지막 방한 이후 거동이 불편해져 더 이상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최후의 여행을 꿈꿉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기사가 모는 택시를 하나 빌려 전국 곳곳을 돌며 고향 산하에 이별을 고하고 싶어요. 늘 생각하지만 마음뿐입니다.”

-동아일보, 2017.11.18., 서영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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